참선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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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동선사(海東禪史)
  • 선불교란 무엇인가
  • 화두(話頭)
  • 화두 공부의 단계
  • 현대에 있어서의 선(禪)

선의 의의

가) 의의
나) 기원
다) 유래

선(禪)을 선(禪)이라 하면 곧 선(禪)이 아니요, 도(道)를 도(道)라 하면 이미 도(道)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선(禪)과 도(道)는 언어문자와 일체명상(一切名相)이 끊어진 자리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또 禪이 禪이 아님이 아니요, 道가 道 아님이 없다. 禪과 道는 취할 바도 못되고 버릴 바도 못되는 것이다. 禪이라고 하는 것을 여의고는 별로 禪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禪이면서 곧 禪이 아니요, 禪이 아니면서 곧 禪이 되는 것이 이른바 禪이다. 이와 같이 禪의 오묘한 뜻을 범상한 말로 나타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禪은 범인이 알 수도 이를 수도 없는 그런 곳에 있는 초월적이며 초현실적인 것일까. 진정 禪이란 무엇이며, 또 禪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가) 의의
참선(參禪)이라 함은, 넓게는 부처님 당시에 하셨던 초선에서 상수멸에 이르는 선정과 37조도품, 위빠사나와 아나파나삿티에서부터 중관의 반야공관, 유식의 유식관, 화엄의 해인삼매, 천태의 일심삼관 등 생사를 해탈하기 위한 불교의 모든 수행법을 통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좁게는 인도의 명상수행법을 중국의 선종에서 발달시킨 조사선(祖師禪)의 수행법을 말합니다. 參禪은 참구(參究)한다, 참여한다는 의미의 참(參)과 선(禪)이라는 말의 합성어인데, 참구(參究)는 논리와 사량분별을 떠나 체험과 직관에 의해 파악해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禪이란 범어로 드야나(Dhyana)인데 이를 음사해서 한자로 선나(禪那), 다시 줄여서 선(禪)이라 합니다. 그 뜻을 해석하면 고요히 생각함(靜慮), 또는 생각하여 닦음(思惟修)입니다. 또한 참선은 "禪하는데 참여한다"는 뜻과 "참례선지식(參禮善知識)하여 문선(問禪)한다"하는 뜻을 포함하여 "參禪"이라고도 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곧 선지식을 찾아 묻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고락(苦樂)의 양 극단을 피하고 중도의 깨달음을 성취하신 수행법을 중국 사람들의 근기(根機)에 맞게 중국의 선종에서 발달시킨 조사선(祖師禪)의 수행법으로서 논리와 사량분별을 떠나 체험과 직관에 의해 마음을 닦는 수행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나) 기원
禪은 B.C. 3000년경, 인더스 문명(lndus civilization)의 유적지 모헨조다로(Mohen jodaro)에서 출토된 유물인 인장(印章)등에 새겨진 요가의 좌선상(坐禪像)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불교 이전에도 인도 수행자들 사이에서 요가(搖加, Yoga)란 이름으로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요가는 범신(梵神)의 본성과 일체화됨으로써 하늘에 태어나는 데 목적이 있는 데 반해, 禪은 산란한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진리를 직관하여 지혜를 얻어 해탈, 대자유를 얻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다) 유래
선(禪)의 유래는 영산회상에서부터 비롯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백만억 대중에게 법을 설하실 제 대범천왕(大梵天王)이 꽃비를 내려 공양했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꽃을 하나 들어 보이시니 오직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으실 뿐이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나의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 하셨습니다. 이를 염화시중의 미소(靈山會上 擧拈化示衆)라고 합니다. 또 부처님께서 다자탑전에서 법문하고 계실 때 법석에 늦게 참여한 가섭존자를 불러 자리를 나누어 대중 앞에 앉으셨는데 이를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 分半座)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입적하시자 대중교화를 마치고 늦게 돌아온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관을 세 번 돌고 세 번 절하매 관 밖으로 두 발을 내 놓으셨는데 이를 사라쌍수하 곽시쌍부(沙羅雙樹下 槨示雙趺)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을 선종에서는 삼처전심이라고 하여 선(禪)의 유래가 되었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敎)가 되었습니다. 곧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고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선(禪)과 교(敎)의 근원은 세존이시고, 선(禪)과 교(敎)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니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선(禪)이고, 말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교(敎)인 것입니다.

선의 유형

가) 닦는 사람의 마음에 따른 분류
나) 깨침의 정도에 따른 분류
다) 지역에 따른 분류
라) 수행하는 방법에 따른 분류

가) 닦는 사람의 마음에 따른 분류
선은 닦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외도선
(外道禪)
외도들이 천상에 나기 위해 닦는 禪
범부선
(凡夫禪)
건강을 위하거나 액난을 소멸시키기 위해 범부들이 닦는 禪
소승선
(小乘禪)
무상을 관(觀)하고 부정관(不淨觀)등을 하면서 세상을 멀리하며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며 고요한 것만을 즐기는 禪
대승선
(大乘禪)
법계의 공(空)을 관(觀)하고 중도와 실상을 관하는 禪
최상승선
(最上乘禪)
관(觀)하는 선이 아니라 그대로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禪

나) 깨침의 정도에 따른 분류
선의 깨침의정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의리선
(義理禪)
경전이나 어록 등을 통하여 禪을 이론적으로 터득하는 禪法을 말합니다.
여래선
(如來禪)
여래선이란 말은 능가경(能伽經)에서 규봉종밀(圭峯宗密)스님이 언급한 것으로서 능가경(能伽經), 반야경(般若經) 등 여래의 교설에 따라 깨닫는 禪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하여 달마가 전한 최상승선이라고 하였으나, 문자의 이해에 치우쳤기 때문에 조사선(祖師禪)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조사선
(祖師禪)
중국의 당나라 때 등장한 선풍(禪風)으로,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표방하며, 언어와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의 체험을 조사(祖師)가 직접 점검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인가하는 까닭에 조사선이라 합니다. 남종선(南宗禪)이라고도 하며, 여래선(如來禪)에 상대되는 개념입니다. 육조혜능대사에 이르러서 시작된 선종의 오가칠종(五家七宗)은 전부 이 조사선에 포함됩니다. 조사의 언행을 실마리로 삼아 禪을 실수(實修)하게 되기 때문에 인도로부터 전래된 경전보다는 조사의 언행을 중시합니다.

다) 지역에 따른 분류
하나는 인도선이고 두 번째는 중국선인데 중국선은 법화종 계통에서 하는 천태선과 달마선사(達摩禪師)이후의 달마선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체적 유형은 인도선, 천태선, 달마선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인도선
(印度禪)
인도선의 기원은 요가(Yoga)에서부터 찾아집니다. 요가는 인도 고유의 수련법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의 禪과 요가의 다른 점은 요가수행의 최고 경지는 마음의 움직임이 일체 끊어진 지멸(止滅)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요가의 최고 경지를 의식이 없으면서 의식이 없는 그것마저도 아닌 상태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 볼 때는 이것은 완전한 해탈의 경지는 아니었습니다. 인도선에서는 수식관(數息觀), 부정관(不淨觀), 백골관(白骨觀)등이 있습니다. 수식관은 좌선하는 자세로 자신의 호흡을 세는 데에 집중하여 마음의 산란함을 방지하는 관법이고, 부정관은 육신의 부정한 모양을 관하여 탐욕을 다스리는 관법이며, 백골관은 인간의 백골을 관하여 집착을 없애는 관법입니다.
천태선
(天台禪)
천태선은 중국에 와서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 538-597)가 세운 법화종에서 강조되었습니다. 천태선은 법화경을 비롯한 대승교리가 그 내용이 되고 방법에 있어서는 인도의 요가 수련법을 그대로 형식상으로 옮겨와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리하여 천태선은 법화경 사상과 인도의 요가 형식이 한데 어우러져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태선에서는 지관법(止觀法)을 쓰고 있는데, 즉 마음을 거두어 망념을 쉬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깊은 진리의 마음의 세계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
달마선
(達摩禪)
달마선의 기원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견해와 학술적인 입장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부처님의 삼처저심(三處傳心)이 달마선의 기원이라고 봅니다. 부처님께서 다자탑 앞에서 법을 설하고 계셨는데 가섭존자가 늦게 왔습니다. 가섭존자가 자리가 없어서 앉지 못하고 있을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아무 말 없이 앉아 계시는 자리의 반을 내어주자 가섭이 아무 말없이 앉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같이 앉은 것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마음을 전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달마선은 조사선(祖師禪)이라고도 하며 묵조선(默照禪)과 간화선(看話禪) 등이 있습니다. 묵조선은 정려(靜慮), 즉 생각을 고요히 맑히는 禪이고, 간화선은 1700공안(公案)을 사용하여 화두를 간(看)하는 禪입니다.

라) 수행하는 방법에 따른 분류
부처님으로부터 28대 조사인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전한 선(禪)은 순수한 인도의 관심선(觀心禪)이었지만 차츰 중국적인 것으로 면모를 바꾸면서 체계화되어 갔습니다. 달마대사로부터 전승된 선(禪)이 6조 혜능(慧能)대사 이후에는 여러 계파가 형성되어 9세기부터 11세기 사이에 5家 7宗이 생겨나 선풍(禪風)을 드날리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南宋이후에 청원계(靑原系)의 조동종(曹洞宗)에서 나온 천동정각(天童正覺)선사가 널리 편 묵조선과 임제종(臨濟宗)의 대혜종고(大慧宗)가 확립한 간화선이 가장 대표적인 선풍이었습니다.

묵조선
(默照禪)
오로지 침묵만을 지언(至言)으로 삼는 것으로서 묵묵히 안으로 관찰하여 그 마음을 청정케 하고 그 법(法)의 근원을 철견(徹見)하는 선법(禪法)입니다. 즉, 인간의 마음이란 묵조(默照)하면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지 화두를 가지고 의심하고 참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조동종(曹洞宗)의 禪法으로서 묵조선의 입장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로 지관타좌(只管打坐)란 말이 있습니다. 지관(只管)이란 '오직 한 길' 의 의미이며, 타(打)는 '강조' 의 의미이고 坐는 '좌선'의 뜻으로, 잡념을 두지 않고 오직 성성적적한 마음으로 좌선할 따름이라는 말입니다. 묵조선이란 이름은 묵조선가(默照禪家)에서 자신들이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묵조선의 거장 천동정각(天童正覺,1091-1157) 선사가 '오직 앉아서 묵묵히 말을 잊고 쉬어가고 쉬어가게 한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대혜선사(大慧禪師)께서 그의 가르침을 비난하여 '묵조사선(默照邪禪)' 이라 지칭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간화선
(看話禪)
간화선(看話禪)이란 우주와 인생의 근원을 규명해 나가는데 있어 화두(話頭)라는 문제를 가지고 공부해 나가는 참선법입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간(看)은 '본다' , '참고한다'는 의미이고 화(話)는 '말'입니다. 여기서의 '말'의 의미는 보통의 '말'이 아니라 "말 이전의 말"이고 "말 밖의 말"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화두는 부처님과 祖師스님들의 말씀이나, 행동, 그리고 문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논리적으로 풀 수 없고 생각이 끊어진 세계를 나타내는 말 이전의 말인 것입니다. 이러한 화두를 참구하여 항상 그것을 의심해 나감으로써 궁극에 가서는 의단(疑團, 의심덩어리)이 타파되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수행법이 바로 간화선입니다. 흔히 간화선하면 임제종(臨濟宗)의 선풍을 일컫는데 현재 우리 나라 선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선법의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① 활구선
(活句禪) 이치길(理路)도 없고 말길(語路)도 없이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선(禪). 어구(語句)에 대해 배우면서도 그 어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고 어구의 참된 의미를 체득하는 것이 중시됩니다.
② 사구선(死句禪) 화두를 부처님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해 들어가는 죽은 참선(參禪)

선의 종지

가) 불립문자(不立文字)
나) 교외별전(敎外別傳)
다) 직지인심(直指人心)
라) 견성성불(見性成佛)

禪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표방합니다. 언어 이전의 생명 그 자체, 다시 말해서 활발발한 깨달음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입니다.깨달음 그 자체는 언어와 문자, 형식과 논리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심인(心印)으로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또한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다.' 라는 말마저 버려야 합니다. 불립문자의 진정한 뜻은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 결코 문자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 교외별전(敎外別傳)
진정한 법(法)이나 도(道)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경전은 단지 우리의 참된 면목을 바르게 일깨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인 것입니다. 물맛을 직접 보아야 제 맛을 알 수 있듯이 설명만으로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전공부가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언어나 문자가 미치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세계는 교(敎) 밖에 따로 전한 삼처전심(三處傳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삼처전심은 부처님과 제자 가섭 사이에 이루어진 마음의 형태입니다.

다) 직지인심(直指人心)
직지인심이란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뚜렷이 밝은 우리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으로서의 마음은 결코 참마음(眞心)이 아니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참마음인 것입니다. 마음은 주체이므로 그것이 대상화되면 벌써 그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라) 견성성불(見性成佛)
자신이 지닌 본래의 성품을 철저하게 보는 것을 견성이라 하였습니다. 본래의 성품이란 어느 때나 청정무구하여 절대의 그 경지이며 영원불변한 것입니다. 이런 차별 없는 본성을 보았다 함은 법신의 부처님과 하나 되는 것이며 그것은 내심의 부처가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의 전래

삼처전심 이래로 부처님의 법은 마하가섭에게로 전하여 졌고, 마하가섭은 아난존자에게 아난존자는 상나화수존자에게 그리고 계속해서 28대 보리달마존자까지 인도에서 전하여져 오다가 보리달마존자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혜가대사, 승찬대사, 도신대사, 홍인대사, 혜능대사까지는 법의 전수를 의미하는 의발(衣鉢)을 오직 한 분에게 전해져 내려 왔지만 혜능대사 이후로는 의발을 전하는 전통이 끊어지고 法을 여럿에게 전하게 되어 禪의 황금시대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마조도일(馬祖道一)下의 법을 이은 석옥청공선사에게서 태고보우국사가 법을 전해 받으니 해동에 선종이 발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중기에 서산과 부휴로 나뉘어지게 되고 서산문하에서 환성지안선사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다가 잠시 그 전등의 불꽃이 희미해지던 차에, 구한말 경허선사가 근대선의 중흥조로서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린 이후 만공, 혜월, 혜봉 등의 선지식이 배출되었고 만공선사의 법을 전강선사께서 이으셨습니다. 법맥(法脈)이란 법(法)을 바탕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어지는 견고하고도 도도한 흐름을 의미합니다. 법이란 진리인 것입니다. 특히 선종에서는 법맥을 선맥이라 하여 강조하고 있고 어느 종파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선종에서의 법은 깨달음이고 깨달음의 역사는 선종의 역사이며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선맥이요 법맥인 것입니다.

해동선사(海東禪史)

가) 삼국시대
나) 통일신라시대
다) 고려시대
라) 조선 및 현대

가) 삼국시대
한국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 중국의 전진왕 부견이 순도스님과 불상, 불경을 고구려에 보냄으로써 비롯되었고,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에 마라난타가 인도로부터 들어옴으로써 전파되었습니다. 신라는 제19대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신라에 옴으로써 전래되었으나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에 의해 국교로 인정되게 되었습니다.

나) 통일신라시대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불교도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고승대덕이 배출되었으니, 교종(敎宗)은 열반종(涅槃宗), 율종(律宗),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법성종(法性宗)의 오종(五宗)이 흥성하여 이를 오교(五敎)라고 합니다. 선종에 있어서는 신라 선덕여왕 당시 당나라에 건너가서 4조 도신(道信)선사의 법을 이은 법랑(法郞)스님을 들 수 있으나 그의 귀국 년대가 확실치 않아 그 다음에 선(禪)을 우리 나라에 전래한 도의국사(道義國師)를 해동선(海東禪)의 초조(初祖)로 삼게 됩니다. 도의국사(道義國師)는 법명이 명적(明寂)으로 선덕왕5년(서기784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강서(江西)의 개원사에 이르러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을 전해 받고 법호를 도의(道義)로 받았으며 백장회해(百丈懷海)께 나아가 뵈오니 "강서의 선맥이 모두 해동의 스님에게로 돌아간다"라는 격찬을 들었습니다. 이후 헌덕왕13년(서기821년)에 귀국하였으나 교종의 융성으로 선(禪)을 신봉하는 이가 없어 강원도 진전사에 은둔하시다가 법을 염거화상(廉居和尙)에게 전하시고 입적하셨습니다. 또한 도의국사(道義國師)와 동시대인으로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법을 전해 받은 홍척국사(洪陟國師)가 계시며, 홍척국사(洪陟國師) 이후에 선종(禪宗)에서도 고승대덕이 배출되어 흥덕왕조부터 신라 말에 이르기까지 약 130여년간 선(禪)의 구산(九山)이 형성되었으니 교(敎)의 5宗과 함께 신라불교를 오교구산(五敎九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九山은 모두 6조 조계혜능(曹溪慧能)선사의 법손에 해당하므로 조계종(曹溪宗)이라고도 합니다.

다) 고려시대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구산(九山)은 점차 쇠퇴해 가다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수입한 천태종이 선의 재부흥을 일으켜 바야흐로 오교양종(五敎兩宗)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뒤 해동선(海東禪)의 중흥조 보조지눌국사(普照知訥國師)가 선교양종(禪敎兩宗)을 통합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종지를 내세워 종풍을 회복하였으며, 혜충왕때 가지산문의 법손인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는 선의 구산문을 통일하여 조계일종(曹溪一宗)을 만들었으니 한국의 수행자들은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의 법손(法孫)이 아닌 이가 없다할 것입니다.

라) 조선 및 현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부의 배불정책으로 불교는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다시 나뉘어졌고 일제시대에 이르러 전국 31본산이 통합되어 조계종(曹溪宗)으로 불리우게 되었으니 우리 해동선(海東禪)은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를 종조(宗祖)로 삼고 총본산 사명(寺名)도 태고사(太古寺)로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60년대 비구·대처의 대립으로 총본산이 조계사(曹溪寺)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와 같이 한국불교는 오교구산(五敎九山) → 오교양종(五敎兩宗) → 선교이종(禪敎二宗)에서 조계일종(曹溪一宗)으로 변해 왔습니다.

선불교란 무엇인가

가) 선불교(禪佛敎)의 정의
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다) 조사란?

가) 선불교(禪佛敎)의 정의
오늘날 동양의 정신이며 참된 인간의 근원적인 지혜로서 인류의 지적(知的)유산으로 주목되고 있는 선불교(禪佛敎)는, 9세기를 전후하여 중국 당나라를 중심으로 활약한 실천불교의 선구자인 선승(禪僧)들의 뛰어난 예지(叡智)로써 종래(從來)의 전불교(全佛敎)를 선(禪)의 실천으로 새롭게 종합한 조사선의 불교사상을 말합니다. 이러한 선불교의 특징은 일반적인 언어나 문자로는 깨달음의 경지인 진리의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나 부처님의 정법은 경전에 문자로 기록된 것 이외에 마하가섭에게 가만히 마음으로 심법(心法)을 전하였다고 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과 「이심전심(以心傳心)」, 그리고 자기의 참된 불성(佛性)을 깨달아 각자가 부처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잘 알려진 명구(名句)들이 대변하고 있습니다. 선불교의 실천 사상은 각자 자기의 성스러운 불성(佛性)을 깨닫고 불도(佛道)를 이루어 인격완성을 이룩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전통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부처님의 말씀인 성스러운 경전을 읽고, 배우며, 해석하고, 연구하는 교학불교의 성격을 탈피하고 선의 실천을 통하여 부처님의 근본 정신을 각자가 체득하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신에 의거하여 자기의 참된 불교관·종교관·인생관을 확립하는 불교사상입니다. 그리고 조사들은 선의 실천을 통하여 체득한 깨달음의 확신으로 각자가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의 참된 정신을 전개하고 실천하는 생활종교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즉, 이것은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의 권위나 전통적인 관습, 의례 의식 등 일체의 형식과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 각자의 본래 자연 그대로의 존재 (無位眞人, 無依眞人)인 참된 자아(自我)를 깨닫고,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우리들 자신에 대한 현실성(現實性)의 재확인(再確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제선사는 「지금(只今) 여기 내 앞에서 나의 법문을 듣고 있는 자네(自己)가 바로 다름 아닌 부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이처럼 선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의 자기」를 재확인하도록 누누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시대에 완성된 조사선은, 인도에서 발전된 대소승(大小乘)불교의 근본정신인 반야의 지혜와 공(空)의 실천 사상은 물론, 중국에서 발전된 종파불교와 종래의 전불교(全佛敎)의 사상과 실천을 전부 종합하고 집대성하여 새로운 선불교를 완성한 것입니다.

나)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이러한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전개하는 선불교의 정신을 중국 당나라 시대에 유명한 마조도일(馬祖道一)선사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우리들의 평상심(平常心)으로 전개하는 이것이 다름 아닌 바로 진실된 삶(道)인 것이다(平常心是道).」라는 한 마디로 멋지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 마조선사가 말한 「평상심(平常心)」은 대승경전에서 한결같이 설하고 있듯이 인간은 누구나가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불성(佛性) 혹은 종자를 지니고 있다는 여래장(如來藏)이나, 불성인 진여(眞如)는 자성(自性)이 본래 청정하다 하고 설하고 있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란 말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불교에서는 우리들 인간 누구나 지금 여기에서 평범한 삶을 전개하는 근원적인 자기의 주체를 불성, 혹은 자성청정심 등으로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이고 성스러운 불성을 마조선사는 중국적인 쉬운 말로 「평상심(平常心)」이란 말로 바꾸어서 표현하고, 그러한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의 그 모두가 다름 아닌 진리의 세계(道)이다 라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 조사란 ?
이렇게 자기의 본래심인 불성을 깨닫고 평상심으로 자기의 일상 생활을 진실되게 전개하는 사람을 선불교에서는 조사(祖師)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자각의 주체인 불성과 만법의 진실된 도리를 깨달은 사람을 중국 선종에서는 조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선불교를 일반적으로 조사선(祖師禪)이라고 통칭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중국 조사선의 선승들은 인도불교에서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으로 「부처님」혹은「여래」·「보살」등으로 부르는 칭호에 대신하는 이상적인 인격으로서 「조사(祖師)」라는 말로 통칭하고 있습니다.

화두(話頭)

화두는 부처님과 祖師스님들의 말씀이나, 행동, 그리고 문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질문입니다. 話는 선종에서는 단순한 말이라는 뜻이 아니고 宗旨를 표현하기 위한 말 밖의 말이므로 보통의 말과는 그 뜻이 다르고, 頭란 어조사로서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화두의 내용은 언어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몇 마디 말에 핵심을 담고 있어서 언어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근본 의미를 체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두는 또한 公案이라고도 하는데 공부(公府)의 안독(案牘)의 준말, 즉 정부의 문서라는 뜻이며 관공서의 일은 모두 문서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일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법칙이듯이, 화두는 참선 수행할 때 수행자가 반드시 지켜야할 법칙이므로 공안이라고 합니다. 화두는 佛祖가 깨달은 내용이고 우주만유의 이치이며 진리이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해도 분명한 표현은 어렵고 문헌상에 오른 것만 1700개나 있지만 이 모든 공안이 말로써 설명되거나 이해되는 내용이 아니면서도 일상생활에서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안도 언어의 표현을 빌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공안 그 자체의 핵심을 상실하거나 잘못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표현을 넘어서 棒 · 喝 등의 과격한 동작에 의한 禪修行의 지도가 있게 된 것입니다. 간화선은 바로 이 화두를 통해서 의심을 일으키게 하고 그 의심을 스스로 해결하여 깨닫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화두 중에는 "이뭣꼬?", "無"자 화두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화두를 간택해서 정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진을 이끌어 줄 믿을 수 있는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받아야 합니다. 책을 보고 화두를 간택해서 정진을 하거나, 아니면 어느 화두가 나한테 맞는 것 같다고 하여 스스로 화두를 간택해서 화두를 들고 정진해 나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낯선 길을 갈 때에도 안내자가 필요하고, 길을 물어 볼 사람이 필요한 법인데 하물며 눈에도 보이지 않는 마음길을 가는데 어찌 안내자가 필요 없겠습니까. 선지식은 바로 우리를 올바른 정진의 길로 이끄는 안내자와 같은 것입니다.

화두 공부의 단계

부처님께서는 6년 동안 한번 앉으셔서는 말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참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다 좌선에서 힘을 얻게 됩니다. 화두 공부를 지어감에 있어 공부의 단계를 굳이 밝힌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그 계차가 엄격한 것도 아닙니다. 수행자들은 이러한 순서를 금과옥조로 생각지 말고 공부해 나가는데 참조로 삼았으면 합니다.

첫째, 송화두(誦話頭)입니다. 이것은 화두를 입으로 외우지 아니하면 의심은 커녕 화두마저 들리지 아니하므로 부득이하여 입으로 소리를 내어 외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간신히 화두가 들리며 의심이 조금 일어나는 정도입니다. 소리를 내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공부에 방해가 되므로 선방 밖으로 나가서 「송화두」를 지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염화두(念話頭)입니다. 목숨을 떼어놓고 화두를 애써 외우다가 보니 지금은 소리쳐 외우지 아니하여도 화두가 마음에 잡히고 희미하게나마 의심은 일어나다 말다가 합니다.

셋째, 주작화두(做作話頭)입니다. 위의 염화두로써 죽자하고 애를 쓰니 어떤 날은 제법 화두가 힘차게 들리고 의심이 번쩍 일어서다가 또 며칠 동안은 잔뜩 애만 태우고 공부는 잘 안되는 날도 있게 됩니다. 참선이 잘 되다가 말다가 하여서 애써 주작하는 것이므로 「주작화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넷째, 진의돈발(眞疑頓發)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애써가므로 공부가 점점 진보되어서 홀연히 八만四천 망상이 뚝 끊어지고 화두에 대한 의심이 정말로 간절하여 앉고 선 줄도 모르며 또한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고 딱 버티고 힘차게 앉아 있게 됩니다.

다섯째, 좌선일여(坐禪一如)입니다. 그리하여 단정히 앉아서 참선을 하는 때에는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앉은 줄을 모르며 화두 의심 한 생각만이 순일하여 쭉 일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어나서 일을 할 때는 화두가 희미하거나 없어지거나 하고 맙니다.

여섯째, 동정일여(動靜一如)입니다. 이 동정일여가 된 공부에 또한 세 가지 단계의 구별이 있으니 좌선일여를 지나서 일을 하여도 화두 의심이 그대로 버티고 있으나 말을 할 때에는 화두가 끊어지는 경우가 그 첫 번째 단계이며, 말할 때에는 잘 되다가 소설이나 잡지 같은 것을 열심히 읽으면 끊어지게 되는 경우가 두 번째 단계이고, 소설을 숙독하여도 화두는 제대로 힘차게 나아가며 또한 일부러 저질러서 남에게 죽도록 매를 맞는 때에도 화두가 그냥 힘차게 나아가야 공부가 비로소 「동정일여」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몽교일여(夢覺一如)입니다. 비록「동정일여」는 된다 하더라도 꿈을 꿀 때에는 공부는 그만두고 번번이 딴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공부를 더욱 돈독히 힘써 가면 꿈속에서도 「동정일여」 때와 같이 三단계로 진보하여서 힘찬 화두의 의심이 앞서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야 비로소 완전한 「몽교일여」가 되는 것입니다.

여덟째, 오매일여(寤寐一如)입니다. 이와 같이 비록 「몽교일여」는 되었다 할 지라도 잠이 폭 든 때에는 화두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것은 순전한 잠만 자는 것이 아니고 희미한 화두가 들려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드러누워서 잠을 자는 시간이라도 잠은 점점 희박해지고 화두의 의심은 점점 드러나서 확실해지는 때에는 잠은 아주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로 이 육신이라는 것이 진공의 무(無)가 변화한 환상(幻想)이기 때문에 이 몸은 당초부터 자고 깨고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다만 이 마음이 스스로 상대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움직인 끝에는 피로하게 되고 잠을 자게 됩니다. 이 화두의 의심이 돈독해져서 잠이 없어지고 「오매일여」가 된 지경에 이르면 불원간에 인생의 본래면목인 이 마음자리를 크게 깨달아서 생사를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홉째, 생사일여(生死一如)입니다. 이 마음 자리를 분명히 깨닫고 또한 깨친 후의 공부를 완전히 마친 도인들은 다 생로병사에 자유자재하였습니다. 병도 앓으려면 앓고 말라면 말며 죽는 것도 병으로 죽지 않고 이 육체 버리기를 옷 벗듯이 자유로이 합니다.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버리고 가며, 이야기하며 걸어가다가 벗어놓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열째, 입태일여(入胎一如)입니다. 비록 이 몸 버리기를 자유로 하여 생사일여가 되었다 할지라도 내생(來生)에 부모될 인연을 만났을 때에 문득 망상을 일으켜서 「생사일여」가 없어지고 태중의 피(血)덩어리가 되어서 생리(生理)에 묻히고 맙니다.

열한번째, 주태일여(住胎一如)입니다. 설사 입태할 때에 「일여」하였다 할지라도 태중에 있는 열 달 동안에 미혹하는 수도 있고, 태중 열 달 동안에 「일여」하였다 할지라도 출태(出胎)할 때에 깜박 잊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열두번째, 출태일여(出胎一如)입니다. 이 「출태」할 시에「일여」하면 영겁에 「일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세번째, 영겁일여(永劫一如)입니다. 이렇게 영겁에 「일여」하여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를 얻어서 성불하게 됩니다 .

이상과 같은 단계가 있으나 이러한 열세 가지 단계를 모두 밟아서 성불하는 것은 가장 참선하기 어려운 근기를 가진 사람이 하는 공부법이거니와, 만약 정말로 여법하게 정진한다면 대한(大限)은 구순(九旬)이요 소한(小限)은 7일이라 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을 참구해도 안되기도 하지만 7일 만에 화두를 완전히 타파(打破)하고 당장에 「영겁일여」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열세 단계의 공부는 자신의 공부가 어느 단계에 있는가 살펴보면서 더욱 더 채찍을 가할 때 참고로 하면 좋을 것입니다.

현대에 있어서의 선(禪)

가)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선
나) 선의 자연친화성
다) 선의 활용
라) 선수행의 핵심요소
마) 선의 효능

가)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선
물질 문명·기계 문명 등으로 특징지어져 온 현대의 서구문명은 분명히 20세기 말로 그 한계를 드러낸 채 종언을 고했습니다. 따라서 근·현대 문명을 이끌어 온 서구사상과 기독교사상은 현대문명의 종언과 함께 그 명(命)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문명, 곧 서양문명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세기의 문명을 이끌 대안사상(代案思想:Alternative thought)으로서 禪은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오늘날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21세기에 있어서 인류에게 당면한 과제는 환경과 복지문제인데, 서구문명의 한계를 드러낸 가장 극적인 예의 하나가 바로 '환경문제'인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를 이끌어 온 서구문명은 인간의 물질적 행복지수를 높여만 준다면 자연을 얼마든지 정복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행복을 무한대로 보장해 주리라 믿었던 개발전략이 환경오염·생태계 파손·자연파괴라는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기상이변과 대기오염 등은 핵전쟁에 의한 인류 멸망보다도 훨씬 더 실감나는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 환경오염은 한 마디로 현대문명의 개발전략이 초래한 인과응보(nemesis effect)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개발전략 중심의 현대 물질문명은 분명히 한계점을 드러냈고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대안사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게 자연친화적인 노장사상과 주관적 유심론의 최고봉인 선사상(禪思想)입니다. 선은 철저한 만물일여(萬物一如)의 일원론입니다. 이는 서구사상의 특징인 상대적이고 이분법적인 이원론(二元論)과는 전혀 배치되게 됩니다. 또 이원론에 입각한, 근·현대 문명이 신주단지처럼 받들어 온 합리성까지도 뒤엎는 역설의 도가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선의 자연친화성
6조 혜능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남양혜충 국사(?∼755)가 무정물도 불법을 설한다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을 갈파한 이래 이 소식을 지음(知音)해야 비로소 선리(禪理)를 깨닫게 된다는 선풍이 풍미해 왔습니다. 21세기에 있어서 인류의 과제인 '환경'은 바로 자연입니다.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선의 자연친화사상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물론 노장사상도 자연친화적이고 여타의 사상도 자연을 중시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선사상 속에는 노장사상이 상당히 녹아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구문명이 환경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노장사상에 큰 관심을 가졌다가 선사상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도 이처럼 선사상 속에 노장사상이 수용돼 있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선사상이 21세기 환경문제를 풀어나갈 대안사상으로 확고한 자리를 굳힐 수 있느냐의 여부는 선학의 발전적인 연구와 실천적인 역할을 얼마만큼 수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확실한 점은 선만큼 자연친화적이고 자연을 경외하는 사상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6조 혜능 이래 조사선을 관통하고 있는 선사상의 핵심인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도 곧 자연의 도를 말한 것입니다. 평상심이란 자연심, 곧 배고프면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껴입는 일상생활을 이끌어가는 소박한 마음으로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바로 그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일상생활 속에 모든 진리가 내재한다고 보는 '平常心是道'야말로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선리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선사들의 樂道歌 역시 자신의 생명을 자연의 질서에 맡기고 산야를 소요하면서 사는 임운자연(任運自然)의 산거(山居)를 다시 없는 선경(禪境)으로 읊조려 왔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禪이 20세기 현대문명의 종말을 불러온 환경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 선의 활용
禪은 흔히 서구인들이 호기심을 갖는 신비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기존의 논리체계를 뛰어넘은 초논리의 논리이며 서구 형이상학을 넘어서 있는 초형이상학일 뿐입니다. 단지 이러한 초논리, 초형이상학의 선사상이 기존의 이분법적인 사유체계로 틀을 짠 문명에서 수용될 수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면서 선적(禪的)인 사유체계가 절실히 필요해졌고 문명의 흐름이 그와 같은 방향으로 기수를 돌리고 있습니다. 이미 구미 선진국의 석학들이 선사상을 21세기 대안사상의 하나로 폭넓고도 깊이 천착하는 가운데 정신분석학·경영학·스포츠 분야 등에서 실용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1) 경영과 선
견성에 이르는 선의 방법론은 전적으로 '직관적 통찰'에 의존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논리적 분석이나 사량적(思量的) 분별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을 한눈에 직관적으로 꿰뚫어보는 것이 선의 진리에 대한 접근 방법입니다. 이 같은 선수행의 전통적 테마인 창의성과 직관력은 정보화시대의 핵심 요소와 일치될 뿐만 아니라 구미 선진국에서는 이미 그 선리(禪理)를 실용화하고 있습니다. 근래 경영학에서도 '직관경영(intuitional management)'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경영은 한 마디로 분석경영이 풍미했습니다. 기업을 시작하려면 원가분석·시장조사·마케팅 전략 등 치밀한 분석을 거쳐 성공을 확신할 수 있어야만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남미·러시아 등을 강타한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여실히 보여주었듯이 현대의 분석경영이 성공의 만능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도심에 칼국수집을 하나 여는 데 한 번 지나가다가 대충 보고 '여기면 될 만하다'는 직관적 판단을 내리고 시작하는 경우가 오히려 그 지역의 집세, 사무실 근무인원, 점심시간의 유동인구 산출 등을 꼼꼼히 따져 보고 시작한 분석경영의 기법보다 더 성공적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관경영의 대표적 사례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지난날 중동 건설공사에 건자재를 바지선으로 운송한 예와 서산 간척지 공사 때 고철선으로 바다의 급류를 막는 데 상당한 효과를 본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정회장의 두 가지 사례는 초등학교 학생에게 물어보아도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같은 경영기법은 비분석적인 직관적 판단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막대한 운송비 절감과 공기 단축이라는 엄청난 경영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직관경영이 만능일 수는 없지만 때로는 직관력이 치밀한 분석력보다 더 정확하고 사물의 본질 접근에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을 전적으로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2) 스포츠와 선
스포츠에서 선이 실용되고 있는 생생한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 프로농구(NBA)의 시카고 불스 팀 감독을 1998년 시즌까지 맡았던 유명한 필 잭슨 감독의 얘기입니다. 그는 1994년 시카고 불스 팀이 3년 연속 우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자 스포츠 기자들이 몰려들어 회견을 하면서 "3연패를 달성한 선수 훈련 비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선수들을 선적(禪的)으로 훈련시켰다."고 말했습니다.(〈뉴스위크〉 1994년 6월 24일자) 그가 말한 '선적(禪的)인 훈련'이란 간단히 말해서 선수들로 하여금 승부에 대한 일체의 집착을 버리고 '무심'의 경지에서 자신들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했다는 얘기입니다. 필 잭슨 감독은 바로 이 선적인 무심의 경지를 선수들에게 체득시켰던 것입니다. 모든 감독과 코치들이 입으론 승부에 집착하지 말고 힘껏 뛰라고 말하고 선수들 역시 관념적으로는 그렇게 하리라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세속의 인간인지라 코트에 들어서는 순간 선수들은 자신도 모르게 승부에 속박 당하면서 긴장과 압박감을 갖게 됩니다. 필 잭슨 감독의 '선적인 훈련'은 구두선(口頭禪)이 아닌 바로 선적인 수련을 통한 무심의 체득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선수들을 코트에 들여보내기 전에 잠시의 틈새 시간이라도 내서 좌선을 하게 해 무심의 심지(心地)가 흔들리지 않도록 안정시켰습니다. 시카고 불스 팀의 시합 전 좌선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단 1분, 5분씩이라도 꼭 하며, 현재도 시카고 불스 팀의 참선은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져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라) 선수행의 핵심요소
(1) 재즈와 선
선(禪)에 있어서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 생성되어 있는 것은 모두 움직일 수 없는 진리라고 보는 입장에서 생긴 공안(公案)인데 바로 이 현성공안이라는 선(禪)의 즉흥성은 재즈라는 즉흥음악과도 상통합니다. 일본의 세계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사토 마사히코는 재즈만의 특성인 스윙이나 블루노트 같은 음악적 장치들을 팝이나 클래식에서까지 구사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재즈의 진정한 가치는 이제 즉흥뿐"이라고 외칩니다. 전형적인 틀이 없는 재즈의 즉흥성과 현장성은 다른 음악이 복제 불가능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몽골 태생의 재즈 보컬리스트인 사인호남치락은 재즈의 진정한 가치와 목표는 "쉬고 있는 두뇌에 충격을 주어 직관적 각성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즈가 지향하는 직관적 각성이라는 것은 바로 돈오(頓悟)입니다.

(2) 창의력과 직관력
21세기를 흔히 정보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보화 시대의 선두주자인 미국의 빌 게이츠와 일본 소프트방크의 사장인 손정의는 수많은 인터뷰와 강연에서 한결같이 "정보화 시대의 핵심요소는 아이디어(창의력)와 감수성(직관력)"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수행은 사물의 실체를 새롭게 인식하기 위한 창의력과 직관력의 배양이며 고양입니다.

돈오(頓悟)니, 견성이니 하는 깨달음도 고양된 창의력과 직관력의 전광석화 같은 폭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가(禪家)는 창의력과 직관력이 배양되지 않은 제자를 절대 인가(認可)하지 않습니다. 제자들 역시 자신의 창의적인 독창성과 주체성을 금과옥조로 여겨 스승의 선법(禪法)을 맹목적으로 암기하거나 추종하지 않았습니다. '덕산의 법을 이었으나 덕산의 선법만은 긍정하지 않는다(嗣德山 又不肯德山)' 방(棒 : 몽둥이질)으로 유명한 덕산선감 선사(782∼865)의 사법 제자 암두전할 화상이 스승의 선법에 맹종하지 않겠다는 독자성을 선언한 사자후입니다. 암두는 선종 법계(法系)상 분명한 덕산의 법제자이지만 "덕산의 선법만은 긍정할 수 없다"는 말로써 스승과는 다른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선법을 펴고자 했습니다. '위산에서 30년 동안 밥을 얻어 먹고 똥을 누었지만 위산의 법만은 배우지 않았다.' 이 말은 위앙종 개산조인 위산영우 선사(771∼853)의 사제(師弟)로 위산이 제자 앙산혜적 선사에게 법을 전해 종문의 기틀을 확고히 다질 때까지의 시간적 틈새를 메우면서 위앙종이라는 선종 종파의 초석을 놓는 데 크게 공헌했던 장경대안 선사(793∼883)가 자신의 독창적인 선법을 밝힌 말입니다. 장경대안은 위산과 한 스승 밑에서 배웠고, 30년 동안을 같이 살며 같은 선지(禪旨)를 펼쳐 왔지만 그 방법과 천착하는 안목은 전혀 같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암두와 장경이라는 두 선사가 토해낸 사자후는 한 마디로 선이 창의적인 독자성을 얼마나 중시하는가를 드러내 보인 단적인 예입니다. 이와 같이 선(禪)은 1,500여년 동안 수행의 핵심요소로서 창의력과 직관력을 고양하는데 주력해 왔습니다. 정보화 시대의 핵심요소와 선 수행의 주요내용이 이처럼 일치하는 것이 우연의 일치인지 인류문명이 지향해야 할 과제인지 아직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본질을 창의력과 절대자유로 보는 선사상은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일 수밖에 없는 앞으로의 천년을 이끌 인류 보편의 윤리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마) 선의 효능
그리고 현대인들은 정보화의 시대에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정신 없이 바쁘게만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육체적, 정신적인 과도한 스트레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인들이 참선을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효능이 있게 됩니다.

① 참선을 하게 되면 신경기능이 조절되고 정상화되어서 심신이 안정됩니다.
② 마음이 차분해지고 느긋해지며 원만해지고 이해의 폭이 넓어집니다.
③ 의지가 강해지고, 정신이 안정되고 집중력이 생기게 되어 일을 도모할 때 능률이 오르게 됩니다.
④ 창조력과 지적능력이 계발됩니다.
⑤ 참선을 하면서 부수적으로 단전호흡을 하기 때문에 생명력이 왕성해져서 건강이 증진되고 병으로부터 회복이 잘 됩니다.
⑥ 이와 같은 점들로 인해서 심신이 안정되고 인격이 도야됩니다.
그러나 참선은 이상과 같은 것들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선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은 내가 나 자신을 깨달라서 진리와 하나가 되어 인격을 완성하고 나아가 일체 중생을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하는 것이며 위의 효능들은 이러한 공부를 해 나가다보면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